F.A.

오랜 기간 동안 여성이라는 존재가 지닌 가능성은 역사에 가려져 있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기회의 제약이 많았으며, 권리 역시 동등하지 못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여성은 그 범주에서 제외된 대상이었다.

 

1800년대 중반부터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여성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여성운동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교육을 받고 사회 활동을 촉구하는 형태였다. 그러다 참정권과 같이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1910년에는 2년 전, 미국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기리고자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이 제정되었다. 그러다 1960년대에 들어 여성 운동은 더욱 체계화되었고, 이념적인 부분과 더불어 환경, 제3세계 등 여러 요소가 결합되며 그 양상이 다원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캠페인들은 주로 대규모 시위 형태였으며, 비영리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여성 인권 캠페인은 시위를 넘어 창의적인 방식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공익적 가치보다는 사익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들도 여성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SNS가 보편화된 2010년대 후반에는 캠페인 명을 해시태그(#)해 임팩트 있는 슬로건 형태를 차용하게 되었다.

 

다루는 주제도 더욱더 다채로워졌다. 다수의 나라에서 여성은 참정권을 획득하였고, 교육과 사회 진출의 기회 모두 증가하였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에서부터 폭력, 각종 사회적 업적에 대한 미흡한 인식, 심지어 나이 등 가시적이지 않은 측면에서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다.

여성 운동 시위 © Time

성 평등 지표와 기업

국제 사회에서 여성 권익을 증진하기 위한 대표적인 노력으로는 새천년개발목표 (millennium development goals, 이하 MDG)와 지속가능개발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이하 SDG)가 있다.

 

8개의 목표로 이루어진 MDG의 경우, 성 평등 및 여성 인권은 3번 목표와 관련이 있었다. 주요 지표는 교육 격차였으며, 2005년까지 초등교육과 중등교육 격차를, 2015년 이전까지 모든 수준의 교육 격차를 없애는 것이 과제였다. 그러나 MDG는 전반적으로 빈곤 문제 해결에 치중한 나머지 부분에 대한 분석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3번 목표에는 세부 목차가 단 하나로, 앞서 말했듯 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여성 권리에는 교육 이외에도 여러 문제가 얽혀 있음에도 MDG는 이 부분을 간과하였다.

 

2015년 도입된 SDG는 17개 목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 평등 및 여성 인권은 5번 목표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세부 목표는 차별 및 성폭력의 종식, 유해 관습 제거, 임신/출산/돌봄에 대한 권리 인정, 정치 경제적 주권 행사 등이다. 스펙트럼이 이전보다 넓어졌다. 지표 역시 기술 및 자원 접근성, 관련 법률의 유무 등 더욱 구체화하였다.

 

그 결과 SDG 도입 전후로 여성에게 불리한 유해 관습이 철폐되는 사례가 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지표들의 성장 속도는 미비한 편이었다. 특히 2020년 이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지표 상승률이 더욱 악화되었고, 오히려 고용의 불안정성이나 폭력의 위험에 노출된 여성들이 증가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2021년에 공개된 Global gender gap index에 따르면 성별 격차는 교육과 건강 (생존) 측면에서 각각 95%와 96%로 매우 좁혀졌다. 반면 경제활동과 정치적 권한 측면에서는 58%와 22%로, 아직까지 상당히 큰 간극이 있다.

 

경제활동에서 성별 격차가 큰 이유는 여성 고위직(임원 이상)의 부족과 팬데믹으로 인한 돌봄 공백, 여성이 다수 포진된 서비스 업종의 막대한 영업 손실이 겹쳤기 때문이다. 여성 고위직이 부족한 구체적인 이유로는 개별 기업이 지닌 승진 시스템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단순히 고용을 증진하는 정책으로는 효력이 없을 수도 있다.

 

또한 UNDP의 2014년 성별 고정관념 조사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이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무려 97%의 여성과 98%의 남성이 여성에 대한 하나 이상의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정치, 경제, 교육, 신체적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업은 여성 권리 증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다국적 기업에서 생산되는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러한 움직임이 비영리단체보다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기업은 자본이나 아이디어처럼 여러 자원을 활용해 독창적이면서도 유연한 움직임을 주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었다. 즉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해 다각적으로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은 해당 기업의 긍정적인 이미지 형성에 도움이 되기에 윈-윈(win-win) 효과를 충분히 거둘 수 있다. 만일 캠페인을 실천하는 한 기업이 내부적으로도 성별 격차를 좁히기 위해 노력한다면,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격차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미 여성 권익 신장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정관념의 중의성

2021년 3월, 버거킹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문구를 트위터에 올렸다. 여성은 주방에 알맞다(women belong in the kitchen)고 쓰인 이 포스트는 언뜻 보기엔 여성의 활동 영역은 주방에만 국한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 보인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보편화되기 전, 여러 제약으로 인해 주부로서만 살아야 했던 그들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시대를 완전히 역행하는 문구다. 논란이 거세지자 버거킹은 사과 후 포스트를 내렸다.

 

그러나 이 같은 해프닝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하단 부분을 읽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파인다이닝 주방, 푸드트럭 주방, 수상 경력이 있는 주방, 일반적인 부엌, 유령 주방, 버거킹 주방. 버거킹이 말하려던 바는 위에서 언급한 전문적인 주방에서의 여성 비율이 매우 적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 여성 조리사의 비율은 겨우 24%이며, 주방장의 비율은 고작 7%다.

 

요리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독점해 왔던 영역이 아니다. 가정에서 요리를 맡았던 주체는 대부분 여자였다. 따라서 힘이나 능력이 부족해 전문 식당에서도 요리할 수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버거킹의 경우, 전문 요리보다는 조리 기술이 더욱 중요하기에 여성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요식업계에서 여성이 비주류에 속한다는 점은 상당한 아이러니다.

 

버거킹이 이러한 논란을 무릅쓰면서도 궁극적으로 알리고 싶었던 것은 바로 버거킹 H.E.R. 장학금이다. 평등한 레스토랑을 만드는 것을 돕는다(Helping Equalize Restaurants)는 뜻을 함축한 이 장학금은 약 25,000달러에 해당하며, 조건에 맞는 최소 2명의 버거킹 직원에게 지급된다. 지급받고자 하는 직원들은 모두 고등학교 학위 혹은 미국 검정고시 (GED) 자격증을 보유한 상태에서 요식업계 고등교육과정을 밟고 있어야 한다.

 

이 장학금의 목적은 더 많은 여성이 정식적인 요식업 교육을 받고 학위를 받음으로써 전문성을 가진 요리사로 거듭날 수 있게 도와주려는 것이다. 유형적인 학위와 함께 무형적인 지식과 기술을 겸비하고 있다면, 요식업계에서 고위직으로 승급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다.

버거킹이 게시한 트위터 게시글 © usatoday.com
버거킹의 장학금 광고 글 © wersm.com

작은 아이디어를 크게

코로나 이후 전 세계 소상공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자영업자(특히 서비스직)들은 본인이 사업을 운영하기에 사회 변화에 따라 성과가 변동되어 발생하는 모든 영향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코로나로 인한 상업적인 피해가 여성에게 더욱 취약했다는 사실이다.

 

2020년 12월, 미국에서 진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12월 한 달 동안 여성 실업자는 이전 해 비해 111% 증가한 반면 남성은 16,000개의 직업을 얻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주로 실직을 경험했던 대공황과 달리, 코로나 시대에는 여성이 주로 실직을 경험하게 되면서 침체를 뜻하는 단어 리세션(recession)과 여성을 뜻하는 단어인 쉬(she)가 결합된 쉬세션(shecession)이란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쉬세션은 자영업에 종사하는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다. 안정성이 보장된 기관에 종사하는 여성들 역시 직업을 그만두는 빈도가 매우 높아졌다. 이 현상은 양육과도 관련이 있다. 대기업의 경우, 근무 시간 동안 자녀를 돌볼 수 있는 센터가 있으나 이러한 시설 또한 감염 발생에 취약하기에 운영 중단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어린 자녀가 감염될 경우 절대적으로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여성은 직업을 유지하기 더더욱 어려워진다. 다행히 실직 여성들에게도 경제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대안은 있다. 바로 재택에서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판매하는 이 커머스(e-commerce)다.

 

핀터레스트는 본래 SNS 플랫폼으로 시작했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비즈니스 기능을 도입하면서 사용자들이 온라인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핀터레스트는 코로나 이후 검색 엔진에서 여성을 돕는 여성(women supporting women), 소규모 사업 계획(small business plan), 재택에서 시작하는 사업(start a business from home) 등의 키워드가 각각 이전 해 비해 2배, 50배, 4배 증가한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2021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이들은 여성이 운영하는 25개 이상의 사업 브랜드 제품들을 소비자들이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큐레이션하였다. 의류, 가구, 액세서리, 화장품 등 다양한 제품들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사업자에 의해 생산되고 소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제품이 지속가능성을 지향하거나 여성 권리 신장 문제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핀터레스트는 여성 인권을 위한 비영리 기구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여성의 날 기금 펀드를 마련하기도 했다.

2020년 이후 불거진 여성 실직 문제 © voxeu.org

눈을 넘어 귀로

역사에 길이 기억될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사회적 차별로 인해 인정받지 못한 여성의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람들은 흔히 초기 컴퓨터 과학의 선구자로 앨런 튜링(Alan Turing)이나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여성인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였다는 사실은 모른다.

 

또한 인물을 알더라도 인물이 세운 다른 업적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DNA 구조를 발견한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에게 증거를 제공한 사람은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이었고, 그녀는 여자라는 이유로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녀가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를 통해 바이러스의 구조를 최초로 발견했단 사실은 DNA 공동 연구에 가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은 주로 과학 영역에서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의 비율이 높은 문화예술 분야에서조차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중음악의 경우, 이제는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나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와 같은 여성 아티스트가 빌보드 1위를 차지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USC 안넨버그(Annenburg)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고작 21.6%를 차지했고, 2020년에는 전체의 20.2%에 불과했다. 같은 해 여성 프로듀서의 비율은 2.6%로 현저히 낮았다. 그리고 33개의 곡 크레딧 중 단지 9개가 유색인 여성에게 돌아갔다.

 

이 모두를 지나온 많은 여성의 삶은 시각 매체인 책과 영상(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라디오나 음악, 팟캐스트와 같이 귀로 듣는 청각 매체 역시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음악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대안적인 플랫폼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음악 및 팟캐스트 스트리밍 플랫폼인 스포티파이는 빌보드 핫 100부터 장르별 음악까지 종합적으로 들을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스포티파이가 2021년 여성의 날을 맞아 이퀄 허브(Equal hub)라는 이름의 캠페인을 내걸었다. 세부 계획의 일환으로 35개 국가별로 여성 아티스트의 곡이 담긴 플레이리스트, 이퀄 로컬 플레이리스트(EQUAL local playlist)와 각 국가에서 발매된 곡이 모인 플레이리스트 이퀄 글로벌 플레이리스트 (EQUAL Global playlist)가 공개되었다. 두 종류의 플레이리스트는 이퀄이라는 장르 안에 속해 있으며, 해당 장르는 영구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온전히 여성에 의해 프로듀싱되고 불린 곡이 담긴 플레이리스트 Created by women이 추가되었다.

 

음악 외적으로도 스포티파이는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 토크쇼 팟캐스트인 WOMN을 런칭하여 다양한 문화예술계 여성이 여성 중심의 콘텐츠와 영감을 준 작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계획을 확장해 가고 있다. 기업 구조적으로는 예술계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을 돕는 기관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이사회인 이퀄 보드(EQUAL board)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 나사의 여성 수학자들을 담은 영화 “히든 피겨즈” © hankookilbo.com

매년 3월 8일, 여성의 날이 돌아올 때면 기업들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해 여성 인권 증진 캠페인을 진행한다. 그러나 캠페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단순히 문제를 환기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기업이 자신들의 관행을 성찰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캠페인이 큰 이목을 끌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주최 기관 내부에서 성 차별적인 행보가 발각되면 캠페인의 신뢰도는 자연히 추락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캠페인의 일환으로서 내부적으로는 성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객관적인 평가 기준과 윤리 제도를 확립해야 하며, 외부적으로는 성 평등을 위해 힘쓰는 외부 여러 기관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벤트와 함께 실질적인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여성 권리 증진 캠페인은 비로소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