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조지 오웰(George Orewll, 1903-1950)은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 1946)』에서 작가로서 왜 쓰느냐는 질문에 ‘사회를 바꾸고 싶어서’라 답한다.

 

글을 쓰는 네 번째 목적은 정치적인 목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인 목적이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이다.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이다.
<나는 왜 쓰는가?> 中

 

그는 덧붙여 말한다. 이는 모든 작가가 글을 쓰는 근본적인 이유이며 도달하기 힘든 지점이다. 자신의 글쓰기를 반추하며 그 또한 자신의 글쓰기도 사회를 바꾸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세계적 반열에 드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그도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 글쓰기를 통해 사회를 바꾼다. 이 원대한 포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예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술을 통해 사회를 바꾼다는 사회적 예술, 일명 소셜 아츠(Social Arts)이다.

 

사회적 예술을 정의하기란 그리 간단치 않다. 앞서 예술을 통해 사회를 바꾼다고 정의했지만, 우리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미메시스(mimesis)란 개념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예술이 사회를 반영하고 재현하는 데 익숙하다. 예술사조의 측면에서 봐도 예술이 당대의 사회 및 시대와 동떨어져 창작될 것이란 순수 주의자들의 주장이 한때는 있었다. 그러나 그 가정도 수용미학의 등장과 함께 설득력을 잃어갔다. 수용미학은 작품을 해석할 때 창작자의 의도가 아닌 독자 및 관객의 수용과 해석으로 작품해석을 해 재창조한다는 사조다.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작품(作品)이란 단어에는 어폐가 있다. 작가가 창작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어디까지나 작품을 작가의 산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 대안으로 제시된 용어는 텍스트(text)다. 유래는 직조물을 의미하는 텍스쳐(texture)로, 날줄과 씨줄이 엮인 모습을 형상화한다. 이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를 날줄이라 생각한다면 여기에 독자로 상징되는 씨줄이 엮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는 개념이다. 즉, 작가의 작품은 원본으로서 계속 고정돼 있다면 새로운 독자, 좀 더 확장하면 시대정신이 만나 끊임없이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결코 작가의 것인 작품이 될 수 없으며 사회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텍스트로 계속해서 읽힌다.

 

최근 영화로도 개봉한 <작은 아씨들(The little women, 2020)>의 결말을 예로 들어보자.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 조는 자기 아버지뻘인 독일인 교수와 사랑에 빠지며 끝난다. 당시 소설의 결말과 관련해 저자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 1832-1888)은 출판사로부터 “여성 독자에게 잘 팔리는” 교양소설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의 결말로 바꾸라는 비화가 있었다. 그 후 소설의 결말에 대해 많은 비평가는 저자 루이자 메이 올컷이 상업성과 타협했으며, 여성의 자기희생이라는 당시 중산층 이상에 맞추었다 평했다.

 

그러나 2020년 감독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에 의해 재해석된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결말을 볼 수 있다. 결말에 대해 출판사와 타협을 보더라도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는 고집스레 지키는 조의 모습을 말이다. 저자 루이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작은 아씨들>의 결말에 저자가 겪었던 (소설에는 나오지 않았던) 비화를 삽입함으로써 영화는 원작에 재해석을 가한다. 소설가이기 전에 여성 소설가로서 루이자가 타협을 봐야만 했던 여성 캐릭터의 재현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여성상에 대한 질문은 던지고 우리가 수용하는 여성 캐릭터는 무엇인지 의문을 가한다. 이는 19세기 출간된 책에 한 세기가 넘도록 행해진 페미니즘적 비평 및 시대상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2세기가 지난 21세기 속에서 새로운 결말로 재탄생됐다. 예술은 결코 사회와 괴리돼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앞선 논의를 따라가면 예술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텍스트를 읽은 독자와 관객이 예술을 통해 각성하게 돼 이를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사회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2011년 도가니 현상을 들 수 있다. 2011년 공지영의 동명 텍스트를 원작으로 한 영화 <도가니>가 개봉됐을 때 460만 명의 관객이 모였고 분노했다. 광주인화학교 가해자들에 대한 여론은 뒤바뀌었다. 더욱더 높은 처벌과 정의실현이 요구됐고, 그 결과 도가니법이 발의 및 시행되었다. 도가니법은 장애인 아동에 대한 성폭행 범죄 처벌 수위를 높이고 공소시효를 없앤 내용을 골자로 한다. 여론의 분노에 힘입어 법안은 국회를 통과됐고 즉각 시행됐다.

 

일명 도가니 현상으로도 불린 영화의 저력은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사례로 기록됐다. 이런 사례는 사회가 발전한다는 가정하에 문화예술은 사회발전의 동인이자 조력자로 기능할 수 있는 시각에서 더욱 의미화된다. 도시재생, 교육 치유, 공공 미술이 모두 그 예다. 사회적 예술은 종종 예술을 수단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술이 사회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하기에 일면 이런 비판은 타당한 듯하다.

세상을 바꾸는 '영화의 힘' : 도가니 Ⓒ 경향신문

동시에 예술은 사회발전의 중요한 축이자 사회발전 그 자체일 수 있다. Dessein 외 3인은 이러한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아래의 벤 다이어그램으로 정리했다. (연구진은 예술보다 큰 개념인 문화란 용어를 사용했으니 이를 참고하길 바란다) 그렇기에 예술은 단순히 사회발전을 위한 수단이 아닌, 동시에 예술 자체가 사회발전의 하나의 기둥 및 지표이자 다른 영역을 아우르는 하나의 대분류가 될 수 있다.

예술의 수단화 문제를 해결했다면 다시 원 질문으로 돌아가자. 사회적 예술은 무엇일까? 또 그만큼 새로운가? 서울문화재단은 2017년 사회적 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한 바 있다. 여기서 중요한 발견은 사회적 예술이 새롭게 등장했다기보다 예술의 본디 속성 중 하나이기에 용어 자체에 매몰되기보다 그것이 하는 사회적 예술 활동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한 언급이다.

 

즉 예술가가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이를 통해 사회와 연결되고 변화를 일으키는지 그 관계 맺기라는 활동 속에서 예술과 사회 모두 경험을 한다는 의미다. 활동에 집중한다면 사회적 예술의 효용 가치를 입증하는 지표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예술가가 어떻게 주체가 되는지, 꼭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않더라도, 그 시도와 영향력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산출된 <예술 활동의 다변화와 사회적 실천>(서울문화재단) 연구서를 참고해보면 다음과 같은 잠정적 결론이 난다.

 

작가 개인의 산출물로 관객이 관람하는 예술이 아니라, 집단과 지역, 사회 개인 속에 작용하여 예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변화 유발자로서 예술. 혹은 더 적극적으로 변화를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작가와 대상이 참여하는 공동의 협력 과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그 과정에서 관람이 아닌 체험과 실천을 통해 공진화하는 예술
<출처: 예술의 사회적 활동이란?> 11p –
‘예술활동의 다변화와 사회적 실천 – 예술의 사회적 활동 실태에 관한 연구’

 

여전히 예술가 개인의 산출물을 기반으로 해 있기에 언론, 방송사를 통해 제작되는 르포 및 저널리즘과는 구별점을 지니며 관람이 아닌 체인저(Changer)로서 관객을 호명하기에 기존의 예술이 향유되는 방식과도 차이를 지닌다. 그러나 변화 유발자로서 예술이 무엇인지, 체험과 실천을 통해 공진화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이 또한 추상적이라 확답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기보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적 예술 활동은 귀납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과학자 칼 포퍼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귀납의 논리는 언제나 반증이 존재하니 결코 보편진리가 될 수 없다 했다. 그렇다면 귀납을 통해 사회적 예술 활동을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는 오류가 가득해 보인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자. 예술은 낯설게 하기(остранение, defamiliarization)라 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정의를 빌린다면, 오히려 이러한 보편진리를 뒤집는 게 예술은 아닐까?보편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 모더니즘까지 그 논의를 확장하지 않아도 사회적 예술 활동을 사례를 통해 살펴보려는 시도 또한 역설적으로 예술적 활동일 수 있다. 그러니 정의할 수 없음을 고통스러워하지 말자.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의 낯섦 그 자체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사회 속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실제로 행동하는 기업의 사례를 살펴보며, 동시에 예술가라는 자장을 확대해 사회변혁가로서 예술의 사회적 활동을 이어나가는 두 단체를 통해 사회적 예술 활동을 해석하는 또 다른 예술적 활동을 알아보자.

 

 

We enable you, 우리는 당신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 위누

위누는 문화예술 공유 서비스 스타트업으로 2007년 허미호 대표가 설립했다. 야후에서 플랫폼 제작자로 활동하던 허미호는 메신저나 툴바를 이용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이를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도 IT 기술처럼 좋은 매개가 들어간다면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해당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창업했다. 기업의 목표는 대중이 미처 접하지 못한 99%의 예술과 99%의 대중이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이 되기 위함이다. 2010년 예비 사회적기업 인증을, 2013년 고용노동부로부터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위누는 사회 이슈를 예술로 풀어내는 것을 기본 모토로 삼고 이를 통해 대중적 반응을 얻고자 한다.사회적 예술 활동을 대중적으로 발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사회와 예술 사이에서 기능하는 촉매제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단순 사회적 예술이라는 결과물이 아닌 그 사이에서 진동하는 사회적 예술 활동에 더 부합하다 생각된다. 대표 활동으로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아트업페스티벌을 주최하며 정크(junk)를 키워드로 토이정크, 일레트로닉 정크, 패브릭 정크, 업사이클링 등 환경을 사유하는 공공예술 프로그램 및 워크숍을 진행했다. 아트업페스티벌은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재활용’을 모토로 100인의 아티스트가 30시간 동안 폐자원을 이용해 업사이클링 아트 작품을 만드는 라이브 아트 페스티벌이다.

 

도심 속 버려진 폐목재가 휴식 시설로 재탄생되고 20t의 패브릭이 퀼트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2015년에 서울시 환경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위누는 단순히 환경문제에 관심 있는 작가들을 찾기보다 나중에 성과에 대한 계량화까지 가능한 작가를 찾음으로써 사회적 충격에 대한 수치화를 고민하기도 했다. 현재 위누는 아트 페스티벌과 같은 단기적인 프로젝트뿐만 아닌 지속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마케팅, 계량화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몰라도 사회적 관점을 적용해 예술을 하려는 작가를 발굴하기가 프로젝트 진행의 어려운 점으로 꼽는다. 위누는 이 점을 지속해서 해결할 점으로 생각하며 보다 예술과 사회가 더 많이 만나 그 사이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플랫폼을 꿈꾸고 있다.

작은따옴표로 예술과 사회에 어떤 방점을 찍을까: ‘ ‘(작은따옴표)

2014년 2월에 설립된 비영리 민간단체 작은따옴표는 소수의 청년 예술가로 시작해 현재는 100여 명의 아티스트와 6개 프로젝트팀으로 확대됐다. 서울잡스와 한 인터뷰에서 문화예술 측면에서 선한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문화예술혁명단체로 자신을 명명하고 있다. 주로 문화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문화예술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대표 사례로는 2017년에 진행한 ARTRASH다. 쓰레기를 문화예술로 탈바꿈 함으로써 일상에 버려진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다. 실제 현장 운영비는 취약계층 예술가에게 줌으로써 공익적인 수익 활동을 모색하며 동시에 현재 작은따옴표의 주된 수익 창구로 기능하며 공익과 상업적인 이득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

 

주로 관광지나 축제 현장을 대상으로 전개된 ARTRASH는 관객들이 쓰레기를 주워오면 페이스 페인팅, 캐리커처, 캘리그래피, 버스킹 공연 관람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모인 쓰레기로 설치예술을 하며 관객이 참여자가 돼 쓰레기에서 예술로 변화를 이끌어낸다. 축제가 끝난 이후에는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어르신에게 도움이 되는 크라우드 펀딩 쓰레기통을 하기도 했다. 눈앞의 쓰레기가 예술로 변모하는 과정은 쓰레기 문제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이를 부정에서 긍정에서 바꾸는 가치변환을 통해 예술의 선한 영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 결과, 2015년 서울시가 선정한 서울혁신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한강, 강남, 서울뿐만 아닌 런던 킹스턴까지 곳곳을 누비며 쓰레기가 없어지는 세상만이 아닌 문화예술로 변화하는 세상을 상상한다.

한강몽땅 X ARTRASH 현장사진 Ⓒ 서울와이어

두 단체가 사회적 예술 활동을 견인하는 방법은 결국 참여다. 위누의 프로젝트가 가능하기 위해선 100인의 아티스트가 참여가 필요했으며, 작은따옴표는 쓰레기를 주워오는 시민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문제라고 꼬집는데 그치는 것만이 아닌 예술적이라고 여겨지는 활동을 통해 쓰레기라는 사회적 문제를 예술작품으로 전환시키는 해결의 상상력을 선보였다. 혹자는 그게 근본적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냐고 질문한다. 법과 정치를 통해 쓰레기를 제한하고 매립지를 축소하는 게 근본적 해결책 아니냐고 반문하며 예술의 사회적 활동에 동의하지 못한다. 정치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은 도리어 무엇이 정치적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가장 개인적인 게 정치적이라 혹자는 말했다. 유명 영화감독은 가장 개인적인 게 창의적이라 말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 예술은 출발하지만, 결국 참여하는 관객과 사람들로 인해 가장 정치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늘 사회적인 성질을 지니며 참여를 통해 예술의 사회적 활동은 증폭된다. 그럼 참여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바로 지금의 나, 가장 개인적인 순간 속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그렇기에 사회적 예술 활동은 결코 해결책으로 명명되는 엔딩이 아니다. 개인의 마음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실마리이다. 즉 변화의 끝이 아닌 시작이다. 작은따옴표의 말을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사회문제 해결에는 많은 방법이 있는데 문화가 가장 위대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란 사람을 기반으로 해서 생겨나는 어떠한 것으로 ….. 법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문화로 바꿔 낼 수 있는 영역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문화와 예술은 나 자신을 성찰하고 좋은 물음표를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에 던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개입될 때 사회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게 되며 그것이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역할이라고 본다.
예술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라운드테이블 개최 – 사회혁신 분야 47p –
‘예술활동의 다변화와 사회적 실천 – 예술의 사회적 활동 실태에 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