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기슭, 폐수영장
을지로 재개발로 마음이 뒤숭숭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찰나 누군가 기사 하나를 공유해 주었다. 재개발 정비구역 내에 속한 역사 유산이 손쓸 새도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안을 모색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하는 자발적 시민모임에서였다. 보존 사례 기사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였다. 과연 어떤 곳이길래 철거될 뻔하다가 그 운명을 피해 가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링크를 눌렀다.
철거될 대상은 다름 아닌 서울대 인근에 있는 관악산 기슭에 위치한 폐수영장이었다. 서울대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부터 있었던 곳이고, 1980년대까지 운영되다 1990년대 초 폐쇄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2019년쯤 안전상의 이유로 철거가 결정된다. 비용 문제로 연기되었다가 2021년 마침내 철거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언론정보학과 소속 교수의 설득으로 급하게 공사를 중단한다. 이미 폐수영장의 대부분이 철거된 상태였다. 남은 건 수영장, 네 개의 외벽 중 한 개의 외벽과 부속건물 하나가 전부였지만 의미가 있었다. BTS <화양연화> 뮤직비디오 속 장소가 바로 서울대 폐수영장이었고, 남은 외벽에 출연자가 그린 그라피티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폐수영장이 BTS와 대중문화연구를 하는 교수의 등장으로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고 공사는 중단되었으며, 일부지만 남은 외벽을 활용한 문화공간으로써의 탄생 계획을 알렸다.
#지금 여기, 을지로의 한 골목에서 일어나는 일
말로 전해지는 말이 현장에서 어떻게 풀어지는지 경험하기란 쉽지 않지만 중요하다. 중요성을 인지하고 닿기까지 마음을 먹는 일도 오래 걸린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할지언정 불편함이 지속된다면 용기 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금 어디선가 외치는 목소리는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도 맞닿아 있다. 마음을 쓰고 애써 확인함으로써 목격하는 많은 것들이 앞으로의 우리 삶에 미칠 영향을 간접적으로 체감하는 것과 같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더 멀리 뻗어나갈 수 있도록 힘을 싣는 일은 변화 없이 반복될 미래 대신 더욱더 나은 미래를 향해 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위치한 을지 OB베어 소식을 전해 듣곤 머릿속으로만 수만 번 되뇌이며 공감하다가 마음이 자꾸 현장에 닿아 결국 발걸음을 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과 소리, 그리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특수한 상황을 보면서 그 어떠한 문장이나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동안의 사정을 모르고서야 단번에 뭐라고 판단하거나 해석할 수도 없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되 관심을 주고 응원과 지지를 해온 이들과 함께하며 시간을 보냈다.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목소리를 내고, 피켓팅에 참여하고, 상황을 지켜보고, 맥주를 한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은 이들과 시간을 공유할 뿐이었다. 그렇게 매일, OB베어와 연대하는 시민들은 각자의 시간 속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가고 있었다.
현 을지 OB베어 상황 (2022년 7월 기준)
노포는 아니었지만 재개발 대상지로써의 동네를 기록하며 깨달은 진리 같은 것이 하나 있다. 노포든 동네든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각자만의 규칙을 만들며 생태계를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삶이 그 장소에 녹아들었으며 그것이 곧 정체성으로서 자리 잡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리 잡은 정체성이 빛을 발하려는 순간에 위기에 처하거나 사라지곤 한다는 것도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만들어진 생태계는 혼자 노력해서는 되지 않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독식이 아니라 상생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천천히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완성된 생태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노력과 시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법을 운운하며 따지기 어렵다. 칼로 무를 자르듯이 명확하게 따지기 어려운 부분들이 삶에 존재하고 그 과정이 녹아들어 작동하는 것이 생태계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 과정을 절대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생태계의 의미와 가치를 일찍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를 을지 OB베어는 한 골목에서 3대를 이어가며 장사하고 있었다. 서울시에서 지정한 서울 미래유산과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선정한 백 년 가게가 그 사실을 입증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건물주의 갑작스러운 임대차 계약 연장 거부는 공들여 쌓아 온 그들의 시간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임대료를 올려도 좋으니 같은 자리에서 장사만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에도 강제집행을 통해 가게 안에 있던 집기와 물건들을 모두 어딘가로 옮겨졌고, 결국 OB베어 간판은 사라진 채 ‘힙지로 호프’란 간판이 달렸다.
#독점 그리고 재개발
이렇게 어지러운 상황 속에도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사실이 있다. 드러나진 않았지만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는 을지 OB베어 말고도 또 다른 호프집이 있다. 한 호프집은 현재 재개발로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남은 가게 몇은 영업 중이다. 과연 이들은 건물주와 을지 OB베어 상황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다. 지금의 상황이 그저 을지 OB베어만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인지 말이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을지로 노가리 골목 인근에서 영업하던 많은 점포가 재개발로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여러 점포가 비어 있었다. 노가리 골목과 가까이에 있는 골목에 위치한 몇몇 가게들을 제외한다면, 이곳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 있다.
지금은 이렇게 힙한 상권이지만, 빠르면 5년 뒤부터는 노가리 골목을 찾아볼 수 없을 전망이다. 주변 개발 사업이 조금씩 진척되자 노가리 골목 개발도 초읽기에 들어가면 서다. 노가리 골목의 메인 거리는 을지로 3가 구역과 공구거리인 수표 도시환경정비구역(수표구역) 경계에 있다.
앞서 서울시는 2016년 을지로 3가 일대를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당시 시는 을지로 3가 구역 일대 근현대 건축물 보존지구의 경우 기준 높이 70m 이하, 최고 높이 80m 이하로 결정했다. 이후 현재 제6·9·12 지구 등에서 도시정비형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수표구역은 지난해 9월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수표구역은 현재 정비계획이 결정됐으며, 실시계획 변경인가를 준비 중인 상태다. 을지로 3가 구역 내에서 노가리 골목이 맞닿아 있는 제10·11 지구 등은 아직 별다른 개발 분위기가 없지만, 경계 지역인 수표구역에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 이 일대의 호프집은 자연스럽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을지로 3가 역 인근의 E 부동산 관계자는 “서울시가 을지로 일대를 ‘제2의 강남’으로 만들겠다고 밝히면서 개발업자들이 벌써 노가리 골목 일대 빌딩을 대거 사들이고 있다”며 “노가리 골목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업자는 최대한 매각 시기를 미루려고 하겠지만, 결국에는 오피스텔·상가 등 상업지구로 통 개발될 것”이라고 말했다.
[땅집고 – “여기 제2의 강남 된대요”…시한부 상권된 노가리 골목]
시 관계자는 “수표구역 개발이 실시되면 을지로 3가 구역과 경계 지역에 있는 호프집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고 장사를 않기로 협의가 된 상황”이라면서 그렇게 되면 을지로 3가 구역 내에 호프집 일대가 몰려 있는 구역들도 자연스럽게 개발 사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경제-BTS 뷔가 그래피티한 그 곳…철거 운명 피했다]
기사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추측해본다면 재개발에 대한 보상과 영업에 대한 부분이 협의가 된 상황이고, 대부분의 점포가 이전한 상태니 개발 사업은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개발이 시작되면 장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실질적으로 수월하게 진행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존재를 넘어선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위한 시스템 구축
을지 OB베어는 중기청의 백 년 가게와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소벤처기업부, 백 년 가게
: 제조업 제외 업력 30년 이상의 소상인 및 소, 중기업
: 지원내용-> 홍보, 경영 및 환경개선을 위한 컨설팅, 노하우 공유 및 협력관계 구축
서울시, 서울 미래유산
: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 미래세대에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 무형의 것. 자발적 참여를 전제하고 홍보 지원
두 제도의 취지나 역할을 살펴보면 주로 홍보와 관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서울 미래유산의 경우 자발적 참여를 전제하고 있으며 선정된다고 하더라도 직접적 개입을 통해 어떤 액션을 취한다기보다 선정되었음을 알리는 데 주력한 홍보성 플랫폼에 가까웠다. 유산의 가치에는 의미를 두지만 그 의미를 지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보완적인 장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지난 몇 년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으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거나 사라져 버린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16년 1월 5일 조선일보, 유명무실한 서울 미래유산 사업, 미래가치는 달랑 동판 표식뿐?
2016년 10월 2일 뉴스 1, 신촌의 마지막 한 달 맞는 미래 문화유산 공 씨 책방
2019년 9월 11일 이데일리, 서울 미래유산 헌책방이 사라져 간다.
2020년 12월 10일 뉴스홈, 서울 미래유산 등록 50년 명동 노포, 쓸쓸한 퇴장
2021년 2월 19일 자 헤럴드, 방치된 서울시 미래유산 ‘영동 스낵카’ 고철값에 폐차 위기
내쫓김과 재개발이라는 상황에서 백 년 가게와 미래유산이 무슨 의미일까? 백 년이 되기도 전에 사라지고, 유산이라고 남겨질 만한 것도 없어지는데 무슨 소용일까? 백 년 가게와 미래유산의 취지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존재를 알리는 것을 넘어서 진짜 그 대상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인정받고 영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조치도 함께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알리기만 한다고 해서 뭐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 사례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을지 OB베어에게는 백 년 가게나 미래유산으로 선정되는 것보다 백 년이 될 때까지, 유산으로써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될 때까지 계속 영업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관할 구청이나 지역에서 개입해 상황을 살피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언제까지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 남겨둘 것인가? 자본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 내리는 결론 말고 사회적인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는 행위로서의 결과도 공적으로 인정받고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결론도 있을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 미래유산이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 무형의 것”이라는 정의에서 취지가 비슷하다고는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효력이 없는 취지만 좋은 서울 미래유산 제도 대신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동등한 위치의 법 테두리 안에서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에는 누군가의 독점이 아닌 상생으로 나아갈 길이 열려야 되지 않을까? 결론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상생을 위한 을지 OB베어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사라지고, 지켜지는 것의 운명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던 폐수영장의 계획이 실현되었는지 학교 측에 문의해본 결과, 벤치를 설치해 시민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해 두었으며 전시나 공연 같은 프로그램 신청도 받고 있으니 기획단 측에 문의해 보시면 좋을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 확인하고, SNS 계정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듣고 나니 계획으로만 남은 것이 아닌 현실이 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폐수영장과 노가리 골목은 실질적으로 장소가 지닌 성격이 달라서 비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특정 몇몇을 제외하고 시민들은 잘 몰랐던 폐수영장은 일부 철거되는 곤욕을 치렀지만,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운명에 닿았고, 매일 같은 장소에서 목소리를 내며 상생을 외치는 을지 OB 베어는 쫓겨날 운명에 처해 있다. 때론 장소의 성격을 떠나서 목소리를 내는 주체가 어떤 사람인지, 그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보존 여부가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사라지고 지켜지는 것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과연 우리가 사는 도시에 존재하는 가치 있는 무언가가 예측 불가한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대비할 수 있을까? 사라지고 지켜지는 것에는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만 존재할 것이 아니라 관심을 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쌓여 그것이 받아들여지며 나아가는 일들이 반복되어야 하지 않을까? 매일 반복하는 외침의 목소리가 허무해지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