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당신을 초대합니다. 단순히 상자 밖에서 사고하는 세계가 아닌, 처음부터 상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사고의 세계로요.

I invite you to think not just outside the box, but as if the box never existed.

 

제37회 선댄스 영화제(2021) 총감독 타비타 잭슨(Tabitha Jackson)은 올해 선댄스 영화제의 비전을 이렇게 제시했다. 비대면이 기본 조건이 되어가는 시대 속에서 같은 공간 안, 집단적 대면 체험을 추구하던 축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축제가 벌어지는 물리적 공간을 하나의 상자(box)에 비유한다면, 그 방향은 단순히 디지털을 활용해 물리적 공간 외부에 있는 온라인 세계로 확장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마치 기존의 물리적 공간이 없었던 것처럼, 공중 보건 상황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그 순간을 충분히 고려해 온전히 재창조된 공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2020년, 전 세계 주요 축제는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우려로 인해 비대면, 디지털 형식으로 급진적인 전환을 꾀했다. 또는 개최 시기를 연기함으로써 팬데믹 시대의 축제의 대안이 될 만한 새로운 형식, 내용, 비전 등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21년. 오프라인 행사를 온라인으로 송출하고, SNS로 소통하고, 디지털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이 비대면 축제의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의 기계적 전환을 넘어 비대면이란 용어에 함축된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과연 어디일까? 급진적 디지털화로 전환하는 수준을 넘어 비대면 시대에 맞게 근본적으로 축제를 재창조하는 과정은 무엇일까? 본 시리즈는 코로나-19가 만든 대전환 시대의 모습을 담아 낸 대표적인 세계 축제 사례들을 하나씩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1985년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의 폭격 속에서 위기의 독립영화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선댄스 영화제이다. 2021년 코로나-19로 인한 영화 산업 축소 위기 속에서 선댄스 영화제는 어떻게 기존의 세계를 벗어나 담대히 항해했을까?

"올해 우리는 다르게 합니다" 제37회 선댄스 영화제 공식 포스터 Ⓒ Sundance Institute
"올해 우리는 다르게 합니다" 제37회 선댄스 영화제 공식 포스터 Ⓒ Sundance Institute

매년 선댄스 협회(Sundance Institute)가 주최하는 선댄스 영화제는 1985년 시작 이래 세계 최대 독립영화 축제이자 스티븐 소더버그, 코엔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등 할리우드 유망한 감독들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워낭소리>(이충렬, 2009)가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후보로 오르며 대중적인 관심을 끌었고, 최근에는 한인 이민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미나리(Minari)>(정이삭, 2020)가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가 할리우드 상업주의에 반발해 독립영화 제작을 활성화하고자 창설했으며, 매년 1월경 미국 유타주(Utah) 파크시티(Park City)에서 개최된다. 평균 영하 11도로 떨어지는 겨울의 파크시티에서 영화제에 참여한다는 건 다음의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얼어붙은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피케팅을 방불케 하는 티켓팅을 뚫어야 하며, 꽁꽁 언 발로 상영관을 찾아다녀야 한다. 거기에 산속에 있어 통하지 않는 와이파이도 한몫한다.

 

이 때문에 선댄스 영화제는 방문객과 취재진에게 만만치 않은 영화제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하겠다는 슬로건이 표방하듯, 올해는 달랐다. 2021년 선댄스 영화제는 1월 28일부터 2월 3일까지 총 7일간 개최됐다. 보통 2월 말, 3월 초 즈음에 열리는 오스카 시상식이 4월로 연기되면서,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이 자연스레 향후 오스카의 단초가 될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선댄스의 결과가 오스카의 결과를 예견할 것이라고 점쳐지면서 선댄스 영화제 및 수상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런데 이런 외부 요인에서 비롯된 기대감과는 별개로 선댄스 영화제가 어떻게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포용성(Inclusion), 형평성(Equlity), 접근성(Accessibility) 이 세 가치를 융합하고 영화제의 비전으로서 실현하고자 했는지 주목할 만하다. 영화제 총감독 타비타 잭슨(이하 잭슨)은 <2021년 영화제 개최를 위한 접근법(2020년 6월 29일)>이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잭슨은 글로벌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한 영화제의 모습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

 

  1. 현 공중 보건 상황을 존중하고 그에 순응하면서, 지금까지의 일상과는 완전히 달라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상상력
  2. 접근, 형평성, 포용성, 그리고 독립성으로 대표되는 선댄스 가치를 배가하는 영화제
  3. 영화제 현장에 방문할 수 없거나 방문을 원치 않는 이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면서 대면 모임, 현장 교류도 유지하는, 보다 확장된 형태의 영화제
  4. 독립영화와 커뮤니티의 특성이 살아 있는 영화제
  5. 현지(유타주), 전 세계, 대면, 온라인 모두가 통합적으로 진행되는 축제
제37회 선댄스 영화제 페스티벌 디렉터 타비타 잭슨(Tabitha Jackson) Ⓒ IndieWire
위성 영화관 중 하나인 오클라호마에 위치한 Circle Cinema Ⓒ Sundance Institute

선댄스를 유영하는 28개의 위성

칸, 베를린, 베니스. 세계 3대 영화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대개 영화제란 개최 도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선댄스 영화제가 열리는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는 스키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매해 1월이 되면 관객들은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로키산맥의 일부인 워새치(Wasatch) 산맥에 올라 텐트에 머물며 (물론 돈이 넉넉한 이는 호텔이겠지만) 따뜻한 욕조에 몸을 녹이고 독립영화의 제전(祭典)을 방문한다.

 

그런데 올해 선댄스 영화제는 말 그대로 하산했다. 개최지인 미국 유타주를 딴 유타 영화제가 아닌 선댄스 영화제란 이름은 이를 예견하고 지은 것일까? 영화제는 해발 2km 설원에서 미국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코로나-19로 영화제에 방문하지 못하는 관객을 위해 미 전역 28개 독립예술 영화관과 제휴해 동시 상영함으로써, 관객들이 가까운 동네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였다. 잭슨은 이를 칠레 아타카마(Atacama) 사막에 있는 66개의 망원경에 비유한다. 66개의 망원경의 시야가 결합되면 단일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우주의 원리가 드러나는 것처럼, 중심지 유타와 미국 각 지역에 있는 28개 아트하우스와의 협력은 미국의 독립영화 커뮤니티의 촘촘한 파트너십을 드러낸다. 이 파트너십의 공식 명칭은 위성 영화관(Satellite Screens)이다.

인터랙티브 바에서 영화를 즐기는 필름 파티 참석자들 Ⓒ VRSCOUT
배리어 프리(Barrier Free)한 웹사이트 환경이 구축된 선댄스 영화제 온라인 플랫폼 Ⓒ 선댄스 영화제 플랫폼

영화X기술X예술의 융합

더 이상 비행기를 타고 유타주로 직접 가지 않아도 된다. 영화제는 통합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해 방구석 1열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곳에서 장편, 단편, 인디 시리즈, 강연과 이벤트 모두 디지털 방식으로 제공된다. 73편의 장편영화는 각각 전용 페이지에서 유료로 상영되며, 이후 감독과 관객이 만나는 라이브 Q&A가 이어진다. 영화X예술X기술 융합을 혁신적으로 실험한 작품을 선보이는 뉴프런티어(New Frontier) 또한 별도의 홈페이지로 제공된다. 여기서 우주로 묘사되는 가상 공간으로 옮겨간 선댄스 영화제의 재미있는 실험이 빛을 발한다.

 

유타주에서 하산한 영화제는 저 너머 우주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티저 영상에서도 소개된 스페이스 가든(Space Garden)은 WebXR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 공간이다. 유저들은 접속 후 화살표 버튼이나 간단한 포인트, 클릭으로 이동한다. VR 헤드셋으로도 접속할 수 있다. 아바타 위에는 유저가 설정한 사진이 떠 있다. 여기서 세 가지 커뮤니티 공간인 1)필름 파티(Film Party) 2)시네마 하우스(Cinema House) 3)뉴프런티어 전시회(New Frontier Gallery)에 접속할 수 있다.

 

필름 파티는 사전에 승인받은 페스티벌 참가자들이 소통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소셜 공간이다. 목소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근접 효과 오디오 및 비디오 채팅 기능이 제공된다. 이곳에 접속하면 아바타 위 사진은 웹캠 이미지로 변신한다. 마치 줌(Zoom) 화상회의 영상처럼 말이다. 동시에 6개의 포스트-프리미어 필름 파티가 진행되며, 각각 최대 25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인터랙티브 바(Interactive Bar)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유저들은 가상의 칵테일을 든 채 상호작용하며 영화의 재미를 공유한다. 최대 접속 가능 인원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새로운 파티가 만들어진다.

 

시네마 하우스는 VR 헤드셋을 이용하는 유저들을 위한 전용 공간이다. 영화 시작 10분 전부터 (가상의) 관객들은 친목을 도모하고, 영화가 시작되면 가상의 큰 화면에서 함께 시청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은 서로 대화나 교류를 할 수 없다. 영화 상영이 끝나면 앞서 소개된 필름 파티(Film Party)로 이동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네트워킹을 한다.

 

마지막으로 뉴프런티어 전시회는 가상 공간 전시회로, 유저들은 마치 미술관을 돌아다니듯 자유롭게 탐색하며 예술과 기술이 융합된 최첨단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접근성과 포용성이 주요 가치인 영화제답게 온라인 플랫폼 또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한 환경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웹 접근성 구축 사이트 USERWAY와 협업해 웹사이트 왼쪽 하단에 위치한 접근성 버튼을 활용하여 화면을 소리내어 읽어 주는 기능부터 자간과 문단 간격을 조정하는 기능까지, 장애 유무로 인해 특정 관객이 배제되지 않는 온라인 환경을 구축했다. 영화제 이외에도 선댄스 협회는 예술가들이 서로의 작업과 피드백을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 SUNDANCE CO//AB를 제공하여 비대면 시대 속 예술가가 보다 안전한 창작 환경 속에서 적극적인 의견 공유와 네트워킹을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팬데믹 시대의 축제, 2021 선댄스의 성과

올해 심사위원 대상(미국 드라마 부문)을 수상한 장편영화는 <코다(CODA)>(Siân Heder, 2021)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준말로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자란 비장애인 자녀를 지칭하는 용어다. 영화는 청각장애 가족 중 유일하게 비장애인으로 태어난 주인공 루비(에밀리아 존스)가 가족들 곁에서 생업을 돕는 일과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서는 일 사이에서 갈등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La famille Bélier)>(Éric Lartigau, 2014)가 원작이다. 애플은 <코다>의 글로벌 방영권을 2,500만 달러(한화 약 280억원)에 사들였다. 이는 선댄스 영화제 사상 최고가이다. (<코다>의 방영권을 두고 애플과 아마존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는 비화도 있다.) 새로운 시도 때문이었을까? 선댄스 영화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선댄스 협회 CEO 케리 풋남(Keri Putnam)은 이번 영화제가 사상 최대의 관객 수를 모을 것이라 예상했으며, 그의 예상대로 선댄스 영화제는 총 60만회 이상의 조회 수를 달성했다. 이는 2020년 대면 축제보다 2.7배 증가한 수준이다. 특히 뉴프런티어 영역에는 39,869명이 방문했는데, 평균 2,000명 정도 방문했던 이전 기록들을 상기해 본다면 상당한 수준이다. 물론 그 원인으로는 접근성을 높인 디지털로의 전환과 25달러(한화 약 3만원)의 비교적 저렴한 티켓값이 한몫했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영화제를 실제로 체험한 관객들은 어땠을까? 뉴욕타임즈 4명의 영화 평론가와 기자들이 모여 기고한 <첫 가상공간에서 만난 선댄스, 4명의 전문가가 함께 한 비교분석>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의 공포가 증가했다는 필자도 있었다. 언제, 어느 때나 영화 감상이 가능하니 오히려 모든 영화를 다 봐야겠다는 강박 아닌 강박도 생겼다는 의미다.

 

반대로 영화광으로서 어느 영화도 티켓팅에 실패하거나 놓칠 걱정이 없으니 영화 선택에 대한 부담이 줄어 훨씬 편안하게 빈지 뷰잉(Binge Viewing)을 즐겼다는 언급도 눈에 띈다. 평소 매우 추운 곳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무척 그리웠다고 향수를 고백하는 내용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 우연히 셔틀버스에서 만나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우연의 선물이 더 이상 없다고 그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영화 감상 행위가 점차 사적인 영역으로 변해 가고 있다. 한 스크린에서 함께 웃고 울기보다는 이제는 나만의 가장 안전한 공간에서 내 속도에 맞추어 멈추고 재생하며, 심지어는 건너뛰며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마치 독서처럼, 저마다의 리듬으로 영화 감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동시에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가져다 주는 우연적 만남과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집단적 체험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 간다. 불쾌하기만 했던 앞사람의 핸드폰 불빛과 뒷사람의 발차기까지도 그리워할 날이 올까?

 

속설에 의하면 자크 라캉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행위가 어머니의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아 사람에게 평온을 불러온다고 했다. 그의 언급은 증명할 수도 없고 일면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일이 이처럼 누군가에게 위안이자 위로의 체험일 수도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사회적 거리는 두되, 고립되지 않도록. 이것이 가상 공간으로 옮겨 간 영화제가 앞으로 안고 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선댄스 영화제 창립자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는 스토리텔링의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토리텔러들은 우리의 마음을 확장한다. 보다 참여할 수 있게 하고, 깨닫게 하며, 영감을 준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연결한다.

“Storytellers broaden our minds: engage, provoke, inspire, and ultimately, connect us.”

– Robert Redford, President and Founder –

 

선댄스 영화제는 28개의 위성 영화관과 우주(가상 공간)로 확장해 관객들에게 다가갔고, 우리 시대 스토리텔러들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연결을 경험하는 동시에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을 체험했다. 우리는 이 선댄싱 앞에 혁신과 향수 중 어떤 단어를 붙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