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궁금해지는 동시대 인물이자 한 작곡가가 있다.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혁명가이자 작금의 시대를 표현해 내는 예술가, 막스 리히터-Max Richter(1966~)다. 네오클래식(신고전주의)의 대표이자 연금술사라 불리는 그의 주된 작업은 곡을 만드는 일이지만 사실 막스 리히터의 예술 세계는 단순한 작곡 그 이상의 무엇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막스 리히터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클래식 현대 음악가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을 거쳐, 로열아카데미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이탈리아의 현대음악 거장 루치아노 베리오(Luciano Berio/1925~2003)를 사사했다.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많은 음악적 영감을 얻은 그는 좀 더 시야를 넓혀 현대음악의 거장인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1935~), 필립 글래스(Philip Glass/1937~),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1936~) 등으로부터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았다.
작곡 활동을 기반으로 피아니스트, 프로듀서, 협력자로서 장르 간 경계를 지우고 새로운 형태를 빚어가며 대중의 삶에 새로운 음악을 심는다. 그렇기에 같은 것을 다르게 보이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그의 상상은 현대 음악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활동 영역이 방대한 만큼 그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음반, 영화, 협력자로서 그가 속해 있는 *Deutsche Grammophon에 나와 있는 디스코그래피만 해도 약 50종이 넘는다. 그가 이렇게 다양한 예술세계에 대한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근원은 무엇일까? 그의 활동 중 인상적인 몇 가지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Deutsche Grammophon: 1988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독일의 클래식 음반사
고전(古典)을 새롭게 이야기하다
Recomposed by Max Richter: Vivaldi, The Four Seasons(2012)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1678~1841)의 <사계(The Four Seasons)>는 1725년에 작곡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자 잘 알려진 바로크 음악이다. <사계>의 곡들은 고전(古典)으로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 만큼 우리 일상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고전의 사전적 뜻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라고 정의된다. 이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오랫동안”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은 오랜 시간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문화적 환경 속에서 공통으로 다가갈 수 있는 무언가를 전달할 힘을 담고, 그 힘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영감과 해석이 오고 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보편의 무언가를 지닌 고전을 해석해 새롭게 드러내는 과정은 그간 변해 온 시대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날것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고, 때로는 고전이라는 토대 아래서 혁신을 통해 새로운 것을 재창조할 수 있다. <사계>는 그동안 많은 예술가가 재해석해 왔으나, 재작곡을 한 경우는 드물었다.
막스 리히터는 이 생경한 길을 선택해 <사계>를 재작곡했다. 곡 중 약 75% 정도를 현대적으로 재작곡한 이 작품은 <사계>를 새롭고 신선하게 풀어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덕에 그는 10억 스트리밍, 앨범 100만 장을 돌파한 작곡가가 되었으며(2019년 12월 기준), 이 음반으로 저명한 유수의 상들을 받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계>를 새롭게 재작곡한 이유에 대해 “유년 시절부터 <사계>를 훌륭한 멜로디, 멋진 색상이 어우러진 음악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곡을 통해 음악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깊어지고, 더 깊게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더 사랑하기에 재작곡하게 되었다”고 이유를 밝혔다.
음악으로 풀어낸 현대인의 문제
SLEEP(2015)
현대인이 직면한 여러 정서-정신적 불편함 중 부정할 수 없는 큰 문제가 있다면 바로 수면이다. 실제로 유럽 최대 규모의 수면장애센터 영국 런던 가이병원 임상 책임자인 가이 레시자이너(Guy Leschziner)는 현재 성인 10명당 1명꼴로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인류가 점차 진화하며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양면적으로 야기한 현대인들의 나쁜 생활 습관, 영상, 카페인, 피로, 영상 등이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평소 수면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막스 리히터는 인류의 수면 부족을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예술적 시도로서 <Sleep> 음반을 발매했다. 그는 “휴식이 없이 작동하기만 하는 현대 사회를 보며 이 앨범을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는데, 참고로 이 음반은 인간의 보편적 수면시간인 8시간 러닝타임 앨범(SLEEP)과 잠들기 전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1시간 러닝타임의 앨범(from SLEEP)으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스 리히터는 미국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1971~)과 함께 인간의 뇌와 수면 사이클을 분석했고, 잠과 음악의 상호작용을 곡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 음악은 BBC RADIO3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된 적이 있는데, 그때까지의 가장 긴 생방송 기록을 깨트리고 기네스북에도 올랐으며, 2016년 늦은 봄 호주 시드니 명소 오페라하우스에서도 8시간에 걸쳐 연주된 기록이 있다.
당시 자리에 함께했던 158명의 관객은 의자가 아닌 침구에 누워 자정부터 아침 8시까지 공연을 감상했다. 그 외에도 2017년 스웨덴의 유명 가구 기업 IKEA와 함께 60쌍의 커플을 대상으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수면 콘서트를 개최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티켓을 구매해 참가한 60쌍의 커플은 IKEA의 다양한 침구 제품들을 직접 체험하며 막스 리히터의 음악을 누렸다.
영화의 흐름을 가르는
어느 날 외계에서 온 비행물체가 지구에 도착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언어학 전문가, 과학자는 외계 생명체와 마주해 소통하기 시작하며 그들이 지구에 온 이유를 밝혀내기 시작한다.
테드 창(Ted Chiang/1967~)의 SF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원작을 각색한 영화 <Arrival>의 줄거리다.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막스 리히터의 음악 <On the Nature of Daylight>가 흐른다.
영화 음악을 담당한 막스 리히터가 굳이 오프닝과 엔딩에 이 음악을 동 연속해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막스 리히터는 선율에 영화 속 핵심 메시지를 담아낸 듯하다. 이 음악을 가만히 들어보면 주제 선율도 없고, 화성은 단 네 가지이며, 사용된 악기의 수도 첼로 2대, 비올라 1대, 바이올린 2대로 단순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쩐지 단출해 보이는 이 악기 편성은 오히려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 옥타브 또는 구성의 변화로 풍성한 음악과 감정을 표현해 낸다. 결과적으로 절제되고 제한된 분위기 속에서 들려오는 깊고 폭넓은 선율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막스 리히터는 영화 <Arrival>뿐 아니라 아리 폴만(Ari Folman/1962~)의 <바시르와 왈츠를(Waltz With Bashir/2008)>과 참전 군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전쟁의 기억과 꿈을 한데 모아 보여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브래드 피트(Brad Pitt/1963~)의 절제된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영화 <Ad Astra>의 음악도 만들었는데, 이 모두는 작품 속에서 음악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다.
영화 내에서 음악이 끼치는 영향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흔들 만큼 강력하다. 그렇기에 막스 리히터가 선택하고 작업한 영화들을 살펴보면 그가 작품 내에서 어떤 메시지를 영상과 함께 전달하고 있으며, 영상과 함께 흘러가는 사운드의 빈 공간에 자신의 음악을 채워 넣음으로써 음악을 통해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더 투영시킴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도 막스 리히터는 미니멀리즘한 사운드를 기반한 작곡 활동을 통해 놀라운 창작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다. 앞서 소개한 바로크 음악의 고전 <사계>의 재작곡, 바쁜 현대 사회의 일상을 되짚은 <Sleep> 외에도 2003년 영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The Blue Note Book>, 세계인권선언문을 바탕으로 작곡한 <Voices> 등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품은 채 우리 주변을 흐른다. 놀라운 점은 그가 다른 현대음악과 다르게 현시대의 문제점 등을 고찰하며 메시지를 전하고 기존의 것을 새롭게 풀어낸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현대 작곡가 중의 한 명인 그는 음악을 자신의 모국어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그는 선율이 담긴 자신만의 언어로 상상의 세계를 현실화하고 시대성을 담아낸다. 그러나 그의 창조 세계는 결코 배타적이지 않다. 창작자로서 그의 뿌리가 되는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는 바로 협업이다. 비발디 사계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호프(Daniel Hope/1973~)와 함께했고, <SLEEP>에서는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1971~)과, 2020년 세계인권선언문을 바탕으로 한 <VOICES> 앨범에서는 배우 키키 레인(KiKi Layne/1991~)과 함께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작품의 협업자로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작곡가는 자신이 상상한 그 무엇을 창작물로 만들기까지 누군가와 함께해야 한다. 마치 운명 공동체처럼 필요한 과정을 함께 걸어가며 허공을 떠다니던 자신의 상상이 실제 선율을 입고 우리의 귓가에 울리기까지 체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막스 리히터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혼자만의 독창적인 무엇으로 소유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오가는 많은 사람들과 긴밀히 소통하고 협업하며 현대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가는 중이다. 앞으로도 그가 어떤 것을 매개로 새로운 작품을 꾸려갈지 기대된다. 어느 작품과 활동에서 감상하는 이가 새로운 무엇을 발견할 여백과 여지를 두는 그는, 우리 시대의 작곡가다.